울보대장의 대결 “아아앙”지민이가 울어요. “울면 봐줄 줄 알아?”성난 사자가 호통을 쳐요.지민이는 더 크게 울어요.“아아아앙”“뭐야, 뭐야?”“왜 그래?”아이들이 몰려 들었어요.성난 사자가 우렁차게 말했어요.“선생님! 김지민이가요, 유리 가방 뒤졌어요!”“아아아아앙”지민이 울음소리는 사이렌 소리처럼 밖으로 퍼져나갔어요. 1유리는 가방을 매고 ☆학원에 왔어요. 친구들은 아직 오지 않았어요. 등에 맨 유치원 가방이 활짝 열려있어요. 스케치북이 보이고, 반짝이는 선물 포장지가 보여요.“가방이 하마 입이 됐네?”“유치원선생님한테 받았어요
금둔사 납월홍매이상인 겨우내 남의 곳간에서 씬나락 까먹다가절간 뒤에 곤히 잠들어 있던 구신들잠시 몸 빌려 꽃눈을 뜨고세상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중이다. 홍조를 띤 얼굴이 그럴듯해서사람들이 많이 걸려들어 발걸음을 놓는다.살얼음 낀 겨울 뒤끝,구신들이 펼치는 연의 그물에 걸려든 이들이그동안의 아픈 상처를 싸매고애타는 간절한 눈빛으로떠나간 사랑을 떠올리며 불러들이기도 하고다가올 액운과 행운을 가늠해보며손 모아 기도하듯 사진으로 남기는데 어느덧 세상 구경하던 구신들 무료해져절 공양간으로 몰래 들어갔는지꽃들이 시들시들 이내 떨어져 내린다.예부
민들레 우주선이상인 항암에 좋다는 흰 민들레우물가에서 깨끗이 씻어마루에 가지런히 뉘어놓았다.잎과 뿌리가 시들시들해질수록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꼭 다물었던 꽃망울을 터뜨리며다급하게 둥근 우주 하나씩세상에 피워놓는다. 사지가 깡마르고 심하게 뒤틀리는생의 마지막 찰나까지온힘을 다해 토해 놓은아름다운 우주선들한순간 바람에 힘껏 솟구쳐민들레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는새로운 세계로 환하게 날아간다.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 2020년 『푸른사상』 신인문학상 동시 당선-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
생일 아침 딩동“생일축하해” 메시지가 왔어근데, 내가 기다리는 건친구가 아닌가 봐 제 생일이에요제 생일이라구요제 생일이라니깐요며칠 전부터 광고했거든 지금 내 머릿 속엔에어팟, 십만원, 그리고 갈비가 들어 있어딱 한 번 이 정도 기대할 순 있잖아? 작년처럼이번에도‘꽝’ 이면저녁 땐 로켓을 발사해 버릴 테야 "내 생일이라고!"
새봄 3월 / 고종환(광양제철초) 보고 또 보고 새 봄이 되는 거야내 너를 보면 봄처럼 놀랍다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보면 볼수록 보고싶고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운 너 봄은 닫혔던 겨울을 살며시 열어우리 마음에 새싹을 튀우고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가 보다 땅 속 부지런한 준비가 이제새싹으로 피어나는 3월 얼었던 마음들이 아지랑이처럼스스르 풀려 다시 피어나는 3월 세상을 보고 너를 보고모든 숨쉬는 소리를 보게 된다면 분명 3월은 새 봄이 되어시작이 되고사랑이 될 것이 분명하다봐라 봄이다-------------------------------2
1.첫만남내가 형을 처음 본 곳은 아동센터였다. 형은 교실로 들어오지 않았다. 선생님이 안보이면 로비에서 혼자 주머니에 손 넣고 있다 휑 가버렸다. 또 어떤 날은 선생님 앞에서 고래고래 악을 쓰다 아기처럼 엉엉 울어버리기도 하였다. 그날도 형은 한바탕 악을 쓰고는 센터 밖으로 나가버렸다. 선생님이 형의 뒤를 따랐다. 나도 선생님 뒤를 따랐다. 계단을 내려왔을 때 형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요한아, 요한아." 선생님이 형의 이름을 크게 불렀고, 나는 위쪽 길을, 선생님은 아래쪽 길을 맡았다. "안보여요."내가 선생님 곁으로 다가왔을
봄비이상인 아침에 자고 있는데누군가 창문을 똑똑나는 일어나서커튼 사이로 창밖을 봤다. 아침을 준비하시던 엄마가 말씀하셨다.“봄비구나” 나는 나가서 눈을 감고비 오는 소리를 찬찬히 들어보았다. 똑똑 뚝뚝봄이 예쁜 발걸음 소리를 내며내 마음속으로가만히 들어오고 있었다.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 2020년 『푸른사상』 신인문학상 동시 당선-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제5회 송순문학상 수상. 광양중마초 교장.
시래기 이상인 뒷산에 오르다가 팻말 따라 간배추밭, 몸통들은 다 팔려가고입다가 벗어놓은 헤지고 찢긴 겉옷만즐비하게 널려 있다.주섬주섬 주워 모아 한 아름 안고집으로 돌아오는 신호등 근처주위 사람들이 나를 시래기 쳐다보듯 한다. 끈으로 엮어 뒷베란다에 매달고시들시들 마르길 기다린다.김장배추로 맛있는 김치가 되지 못한 것들대롱대롱 매달려문 열면 파리한 모습으로서걱서걱 삶을 서걱댄다. 몇 달 동안의 바람과 햇살이 스며서 만든가쁜 숨결, 푹 우러나온 시래기국밥 한 그릇 거뜬히 말아먹고 나니그동안 그네들이 즐겁게 맞았던 빗방울들이내 콧잔등에
겨울 木판화이상인 툭툭 불거진 검은 핏줄이 뻗어간다.맵찬 하늘에 자신을 온전히 돋을새김 중이다.손끝이 가늘게 떨리면서 집요한 한 생각을 넓혀가고 있다.사이사이 가득 들어차는 푸르스름한 시간, 봄빛이 감돈다.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 2020년 『푸른사상』 신인문학상 동시 당선-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제5회 송순문학상 수상. 광양중마초 교장.
추억을 깜박거려 본다- 풍남항 등대이상인 가끔 생각난 듯이 추억을 깜박거려본다.낮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서 있다가밤새도록 눈을 뜨고 곰곰이 되뇌어 보는,내 몸에서 그대 생각이깜박깜박 꺼져있을 때가 잦아진다.그대도 어느덧 수평선만큼이나가물가물 잊고 살아가는 날들이 많아질 것이다.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 2020년 『푸른사상』 신인문학상 동시 당선-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제5회 송순문학상 수상. 광양중마초 교장
동천 갈대가 보내는 편지이상인 오늘도 동천 따라 맑은 물이 흘러가고이야기처럼 새들이 날아와동천 속살을 헤집으며 목숨을 이어갑니다. 이곳에서 태어나서 이때껏 떠나지 않고강변을 지키고 있는 우리 이웃들이정말 아름답게 빛나는 가을입니다. 동천변을 걷는 사람들이모두 마스크로 입을 굳게 막고마음속으로 작년 재작년 같은자유로운 날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런 날은 언제쯤이나 올까요?내년, 내후년에는 가능할까요?잘 보살펴서 지구의 신열이 내리고맑고 건강해져야그 품에서 살아가는 우리도 건강하고행복해질 거라고피라미들이 발가락을 간질입니다. 당신의 깨어
결혼기념일을 찾습니다이상인 1월은 맞는데17일인가 20일인가 헷갈리네.그때 눈이 소복이 내렸었지 22일인지도 몰라 그러니까 추억의 서랍에 꺼내 보기 쉽게잘 보관해 두라고 했잖아잘 챙겨둔다고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는데세월을 정리하다가 쓰레기인 줄 알고휴지통에 내버렸는지도 몰라지금쯤 분리수거도 제대로 안 된 채쓰레기 처리장에서 소각되었는지도 혹시 어딘가에 우리 추억의바랜 책갈피로 꽂혀 있을지 모르니묵은 살림살이 좀 잘 살펴보시지버리기는 뭐하고, 입기엔 유행이 한참 지난옛사랑의 호주머니에천 원짜리 지폐처럼 구겨져 있을지도 너무 서운하게
개구리참외이상인 해거름에 엄마가 사 오신개구리참외 몇 개쟁반에서 곧 뛰어오를 듯이잔뜩 웅크리고 있다. 눈도 코도 다리도온데간데없이 몸 안에 숨긴덩치 큰 개구리들강으로 들로 뛰어나가개굴개굴 맘껏 노래하고 싶어기회를 엿보고 있나 보다. 그 마음이 못내 안쓰러워칼을 드시는 엄마에게다음에 먹자고 했다.아빠 오시면 먹자고 졸랐다.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 2020년 『푸른사상』 신인문학상 동시 당선-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강아지 친구들이상인 아이들도 다 돌아간빈 운동장강아지 세 마리 달리기합니다. 반 바퀴쯤 돌더니두 친구가 멈춰 서서뒤따라오는 친구를 기다립니다.문득 자세히 보니왼쪽 뒷다리를 절뚝이며 따라갑니다. 다리 불편한 친구가 다가오자두 친구가 목을 비비대며잘했다고 꼬리를 흔들어댑니다.친구도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번엔 다리 불편한 친구가앞장서서 운동장 반 바퀴를 마저 돌더니 사이좋게 교문을 나갑니다.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 2020년 『푸른사상』 신인문학상 동시 당선.-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
유자이상인 주먹만한 노란 향주머니들 반짝인다.가을의 무게만큼 휘늘어진 모습이풍성하고 탄력이 넘친다.유자나무가 유자 한 알을 내게 건넨다.유자나무도 봄부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군가에게 받았을 것이다.그동안 천수千手에 매달아 놓고즙과 향기가 진하게 배어들도록한 번도 편히 앉거나 누워보지 못한 채서서 기도하며 공을 들였던 것인데무엇인가를 받는다는 일은 가꾸는 정성과다시 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필요한 것유자차를 담그려고 껍질을 벗기면처음 건네준 분의 향기가 진동한다.노란 맨살에서 쏴아 쏟아지는 말씀들재여 놓았다가 차를 내면한 번도 본
아내는 푸른 강물이었네이상인 아내는 푸른 강물이었네날마다 내 곁에서 흐르고 있었지만가 닿기에는 너무 먼 강물이었네. 가만히 들여다보면은어며 눈치며 잉어들이반짝이는 추억을 퉁기며 헤엄치고 있지만내가 뛰어들기에는 너무 깊은 울음이었네. 멀리에서 바라보면아내와 나는 하나의 강물다가와 바라보면영원히 만날 수 없는 두 줄기의 강물. 그러나 어이하리아내는 항상 내 곁에서 흐르고나 또한 항상 아내 곁에서 흐르고 있는 것을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등단-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
내소사 꽃살문이상인 이번 겨울 한 철에는 내소사 꽃살문에서 나고 싶다.솟을 모란꽃살문 띠살문에 끼어들어대웅보전 문틈에 꼼지락거리는 맑고 가벼워진 햇살이나 세어보며. 몇 편의 눈보라를 이끌고멀대같이 서 있는 전나무길로 들어서겠지아차, 길 잘못 든 나그네처럼 기웃거리며절 앞마당 가로질러작은 손 말아 쥔 당단풍나무를 건드려 보다가뒷산 봉우리로 가뭇없이 사라지겠지 꿈속 같은 세상살이야이제 웬만큼 비벼대며 살아봤으니 더 뭘 바랄 게 있겠나앞으로 남은 세월의 푸른 살결도흐르는 구름처럼 저절로 아름다워지느니 어제 절 마당을 쓸다간 바람처럼그동안
열하룻 밤의 달이상인달에 눈물 자국이 선명하다 때론 달도 뒤돌아서서 남몰래 눈물을 흘리고 싶을 때가 있는 거다 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등단-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제5회 송순문학상 수상. 광양중마초 교장.
달팽이이상인 태어나면서부터 연한 혓바닥으로 세상의 밑바닥을 쓸고 닦았다. 그 모습을 보고누군가는 그림을 그린다고 하기도 하고누군가는 태초부터 이어져 온깊은 전언의 상형문자를 온몸으로 써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처음에서 너무 멀리 와버린 우리는그 문자의 뜻을 까먹었거나오랜 기억에서 스스로 지워버려서 바르게 읽고 해석할 수가 없다. 너와 나 사이 빼곡하게 채워진 호흡 같은 의미들바람처럼 일깨워주듯이 우리는 일평생자신의 맨 밑바닥을 쓸고 닦는달팽이 하나씩 데리고 살아간다.
나팔꽃이상인 월산리 마을 회관 담벼락에 입술 붉게 칠하고 모여서동네방네 시끄럽게 입방정 떨어 댄다. 이거도 좋은 한 때라 생각하는지마을 어르신들 모른 체하고지나가는 이들이 지그시 웃음 짓는다. 그래 저물 무렵까진 잠시 잠깐이다.그동안 할 말 못 할 말 신나게 조잘조잘 떠들어라.온 동네가 떠나가게 나팔을 불어 젖혀라.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등단-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제5회 송순문학상 수상. 광양중마초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