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
이상인
주먹만한 노란 향주머니들 반짝인다.
가을의 무게만큼 휘늘어진 모습이
풍성하고 탄력이 넘친다.
유자나무가 유자 한 알을 내게 건넨다.
유자나무도 봄부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군가에게 받았을 것이다.
그동안 천수千手에 매달아 놓고
즙과 향기가 진하게 배어들도록
한 번도 편히 앉거나 누워보지 못한 채
서서 기도하며 공을 들였던 것인데
무엇인가를 받는다는 일은 가꾸는 정성과
다시 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필요한 것
유자차를 담그려고 껍질을 벗기면
처음 건네준 분의 향기가 진동한다.
노란 맨살에서 쏴아 쏟아지는 말씀들
재여 놓았다가 차를 내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분의 마음이
혀끝을 통해 온몸으로 퍼진다.
나도 유자나무에게 받은 그 마음을
누군가에게 건네주고 있는 중이다.
내 몸을 통과하여
온전히 이동하는 중이다.
어디에선가 꽃눈이 불거지고, 꽃이 피고
노란 향낭으로 흔들린다는 소식이
벌써 그다음 곳까지 당도하고 있을 게다.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등단
-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 제5회 송순문학상 수상. 광양중마초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