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소리 멀리 있는 너에게 사랑을 들려주기 위해나는 아파서 더 크게 울어야 한다.온몸이 깨어지는 아픔을 견디며 속 깊은 울음을 울어야비로소 사랑이 네게 닿을 수 있다. 작가 소개 / 이상인-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 2020년 『푸른사상』 신인문학상 동시 당선-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제5회 송순문학상, 우송문학상 수상. 진상초등학교장.
고라니 심경心經/ 이상인 산길에 고라니 한 마리드디어 갈 길 다하였는지 엎드려 있다.고요한 선정에 든 듯며칠을 꿈쩍하지 않더니얼굴 하나 찡그림 없이 내장을 다 내주었다.가죽과 뼈만 남기고어미 개가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듯이배고픈 산짐승들에게 차례로 내주었다.고라니는 혀만 살짝 빼물었을 뿐미동도 원망도 없이 고루 나누어 주었다.굶주려 힘없던 짐승이힘차게 산등성을 뛰어넘고가시밭길을 헤쳐 나갔을 것이다. 고라니 자신이 그동안 달게 받아먹었던풀잎과 나뭇잎과 눈부신 아침 햇살가끔 목을 축이던 계곡물을그저 되돌려 주었을 뿐. 우리도 지나온 길을
새소리/ 이상인 산길을 걸어가는데솔방울처럼 떨어지는 새 소리가내 정수리에 박혔다.잠시 따끔했지만 이내 환해졌다. 새소리는 정수리를 뚫고 들어와실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내 몸 여기저기에 뿌리를 뻗으면서가지마다 연둣빛 새소리가가득 피어나고나는 갈수록 계곡물처럼 말개졌다. 생각 속에도 실뿌리가 번져쑥쑥 키 자라는 한 그루의 새소리나를 만나는 이들도아름다운 새소리를 듣고 놀라워했다. 한 호흡, 내뱉을 때마다새소리가 포롱포롱 날아다니고세상이 온통연한 날갯짓으로 가득했다.작가 소개 / 이상인-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 20
갈대에 이는 바람이상인 멀리서부터 소나기 몰려오는 소리시냇물처럼 왔다가 일부 쏟아내고나머지 시원하게 흘러가는 소리 사그락사그락 야윈 어깨와 어깨가등과 등이 부딪혀 서걱이는 소리 몸과 마음이, 기쁨과 슬픔이 뒤섞여얼씨구! 한 시절 잘 놀았구나함께 손잡고 멀리 떠나가는 소리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 2020년 『푸른사상』 신인문학상 동시 당선-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제5회 송순문학상, 우송문학상 수상. 진상초등학교장.
까치집이상인 어느 날 가리던 것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고 남루한 세간살이가 세상에 다 드러날 때가 있다.얼기설기 지은 그대와의 인연마저 덩그러니 혼자 남아 허공 중에 흔들리고 있을 때가 있다.온갖 맛난 것 다 물어다 애지중지 키운 자식새끼들이 저희끼리 전혀 낯선 모습으로 날아가는 것을 바라볼 때가 있다.포근한 눈 이불을 끌어 덮고 세찬 북풍을 견뎌내며 긴 잠을 청해야 할 때가 있다.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 2020년 『푸른사상』 신인문학상 동시 당선-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
현미밥을 지으며이상인 드디어 코를 씩씩 불어대는 밥솥의 힘찬 가슴앓이, 밥물이 잦아들 동안그대의 듬직한 뒷모습을 떠올려보고그 뒤에 찐득하게 붙어있는 몇 알 잘 익은 숨소리를 눈여겨보네. 밥상은 늘 차려져 있는 것이 아니지다숩고 고소한 밥을 짓는 것도 마찬가지꺼끌꺼끌한 껍질을 벗고 다시 태어나야여러 사람이 나눌 수 있는 고봉밥 되느니 그래 난 지금그대가 보내준 쌀 포대자루에서 몇 줌의 밥을 지어내고 있으니왠지 올 것 같지 않던 내일이피붙이처럼 문 두드리며 들어설 것 같고함께 들어서는 키 큰 희망이반갑게 손 내밀어 악수를 청할 것만 같
학교 강당이상인 아주 큰 공룡 배 속 같은강당에 들어서면모두 신이 나서 뛰기 시작한다. 친구 툭, 치고 달아나면그 친구 잡으러 뛰어다니고잡고 잡혀도둘이서 하하하 교실 의자에 앉아 있던딱딱해진 생각이근질근질하던 어깨와 종아리가얼음처럼 스르르 풀리면서강당 안은즐거운 놀이터 커다란 공룡 한 마리배 속에 든 친구들을신나는 세상으로 데려간다.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 2020년 『푸른사상』 신인문학상 동시 당선-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꽃병 속에 꽂힌 生 자꾸 목이 꺾인다.조용히 손바닥이 마른다. 추억 속에서 추억 속으로다시 끝없는 추억 속으로 이어진빨리 이 길을 지나가고 싶어그 언젠가 쓸쓸히 지나친 기억을오장육부처럼 간직하고 있는 쥔 마지막 꽃잎마저 놓는다.살 속에 녹아 있던 소금기가재결합하였다가 얼음처럼 풀리는 소리한덩어리로 뭉쳤다가 맑게 분해되어 가는 나는, 그 어디선가다시 하나로 뭉쳐지고 있으리.슬며시 땅에 내려놓는다.너무도 목말랐던 이번치 生.
선암사가 다시 지어지고 있다 선암사 한 채 마음 속에 구겨넣으면서선암사 간다. 세월처럼 이어지는 물소리를 따라 올라간다.그 물소리가 끝나는 곳에 멈추어 배추흰나비애벌레처럼 잠시 두리번거리다가바짓가랑이에 묻은 생각 털고한 줌 햇살로 뛰어들면선암사, 쉼없는 물소리가 되어 흘러가고 있었구나. 흘러간만큼 선암사는 다시 지어지고 대웅전 뜰에 우두커니 서 있는 바람도 다시 지어지고박새 울음소리, 와송의 잔기침소리도스님네의 독경소리도, 풍경소리도 늘 다시 지어지고 그 새롭게 지어지는 마음들 속으로둥근 낮달 하나두둥실 떠 간다.
민들레 편지이상인 한 아이가 민들레 꽃씨를정성스레 후- 불었어요. 빼곡하던 흰 우주선이바람 따라 붕붕 떠올랐지요. 가슴 두근두근하늘 높이높이 날아갔어요. 아이는 고갤 들고 까치발로오래오래 올려다봤지요. 하늘에 계신 엄마가민들레 편지를 다 읽어보실 때까지
은어떼이상인 바다와 강이 힘차게 뒤따라왔다.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물방울들앞장서기도 하고 다시 뒤로 돌아가힘들어 하는 놈들을 밀어주기도 하면서물살이 내리치면 칠수록하나의 단단한 그림자가 되어먼저 죽은 놈들의 이름을 불러주기도 하며순백의 미소를 잃지 않는수박향 나는 生 구례구역 앞 섬진 식당한 순배의 술잔을 비운 사이새로 손님들이 들어왔다.식당 주인아저씨, 담뱃불을 내던지더니뜰채를 들고 수족관으로 다가가파닥거리는 한 무리의 은어들을 떠간다.떠가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이제 몇은 세상을 뜨고몇은 직장에서 퇴출되어간신히 여기까지 함께 헤엄쳐
백일홍이상인 한때 나는내 생이란당신 곁에서 백 번을 웃음 지어보다가지쳐서 떠나는 것인 줄 알았다.혼자서 생각을 곱씹으며가슴 속에 흐드러진 분홍빛 풍경을당신에게 백일 동안 보여주는 일인 줄 알았다.그러다가 어느 때그 분홍빛 웃음소리 다 사그라지면그저 또다시당신의 미소를 뜬구름처럼 그려보며오래 침묵해야만 하는 일인 줄 알았다.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 2020년 『푸른사상』 신인문학상 동시 당선-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강의 주름살이상인 강도 오래 살면 주름살이 늘어난다청둥오리가 고갤 처박고 그 주름살을 파먹는다 그 힘든 세월을 강도 하염없이 흘러 왔다이제 어디론가 또 흘러가려고 편히 드러누워 쉬고 있는 것 청둥오리가 막둥이처럼 강의 옆구리를 가슴을 물갈퀴로 자꾸 간질이며열심히 굴곡진 주름살을 헤집고 다닌다 어느덧 강의 깊은 주름살도 펴지는 날이 있을 것이다 편지를 쓰듯 날마다 강에게 묻고 싶어서 강변길을 하염없이 걷는다그동안 여기까지 살아오느라 정말 힘들었지 강이 기척을 하며청둥오리 서너 마리 날려 보낸다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년 『한
우리집에 곰이어떻게 생각해?우리집에 곰이 왔다니까 봄볕 쐬려고 잠깐 열어놓았는데샛문으로 글쎄갈색곰이 들어온거야내가 화들짝 놀래니까녀석도 움찔하더라구그리고는 멀뚱멀뚱풀밭으로 걸어나갔어우왕, 정말 기절초풍할 뻔했어!우리집에 아기곰이 들어왔다구!
애기사과 꽃이상인 애기들이 앙증맞게 피었다.꽃 속에서 수많은 아이의아주 작디작은 울음소리가 들린다. 작년에 죽은 쭈그렁 할머니들이거꾸로 매달려 안을 들여다본다. 따스한 햇볕에 무럭무럭 피어나는 울음소리봄길을 환하게 밝혀주는데누군가 또 한 번 돌아오지 못할 그 길을 걸어갔다.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 2020년 『푸른사상』 신인문학상 동시 당선-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제5회 송순문학상 수상. 광양중마초 교장.
지네는 목욕했을까 어제 끊어놓은 상추 한다발씻으려 수돗물 틀었을 때지네 한마리 고개를 내밀고요리조리 수영을 한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예전같았으면 집게로 꽉 집어패트병에 담고 주둥이를 닫았겠지만 오늘은 살짝 집어 집밖 멀리에 놓아주고 왔다 그리고 다시 상추를 씻고아삭아삭 겉절이를 만들어막 한 젓가락 집으려다 문득,'지네가 목욕은 했을까' 가 궁금해졌다 달팽이 때는 안그랬는데녀석이 있던 상추를 먹으려니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이것도 차별일까 지구의 날,지네를 살린 건정말 잘한 짓이었는지누구에게라도 물어보고 싶다
붉은발말똥게이상인 감쪽같이 교문을 들어와넓은 운동장을 잽싸게 가로질러그러나 2학년 복도에서 들켜팔 들고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이 기분 나쁜지교장 선생님까지 나서서 달래도큰 집게발을 높이 쳐들고붉으락푸르락 딱딱거린다. 게 섰거라, 고함에도슬그머니 옆걸음질 쳐유유히 현관문을 빠져나가는붉은발말똥게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 2020년 『푸른사상』 신인문학상 동시 당선-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제5회 송순문학상 수상. 광양중마
바지락 쑥국 끓이기이상인 어느새 쑥이 튼실하다.돋아나는 봄 새싹을 톡톡 딴다. 바지락에 쑥국을 끓여서 먹으면내 몸속으로 들어온 쑥들이우북하게 자라서 쑥대밭이 되겠지 나는 그 쑥대밭이 귀찮아져서하릴없이 갈아엎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다시 봄,이렇게 고개 내민 싱싱한 쑥들을지난 이야기처럼 캐어다가바지락 쑥국을 끓여 훌훌 마시겠지 그럼 내 몸속에 쑥쑥 쑥이 자라고질겨진 쑥대가 창창한 하늘을 가리고향긋한 쑥 냄새가 내내 진동한다는 것인데 이런 별스러운 생각을 하다 보니드디어 쑥국 완성, 그거 상큼한 게 맛나네.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
자꾸 말을 걸고 싶어진다이상인 봄이 되니 자꾸 말을 걸고 싶어진다.주절 주저리 매화가 피었다고직박구리 꿀 따기 전에 좀 가져가겠다고사정하는 조잘거림 알아듣게 번역해서 너에게 전송해주고 싶다. 너는 봄이 되니 무엇을 말하고 싶어지니 차츰 눈 풀린 앞 강물이어서 오라고 뒤 강물에 전해주는 말알아듣고 졸졸 따라가는 붕어며 피라미 떼아, 그 어지러운 송알거림 입 큰 목련이 한마디 말로 떨어져 내리면벚꽃들이 흐드러지게 이야기를 시작하고 흰 배꽃, 사과꽃들의 반짝이는 속삭임봄이 되니 덩달아 말을 하고 싶어진다. 새싹 내미는 네 물오른 마음 가
나쁜 순돌이 똥개 우리집에서 6개월 살다입양간 순돌이부여까지 차 타고 가는데끽 소리도 안냈대요-뭔 개가 그리 순하대데려다주신 아주머니이렇게 말씀하실 때난 화나 죽는 줄 알았어요 치, 순돌이 녀석하나도 안착하거든요운동장에 가면얼마나 지 맘대론지 아세요?내 말은 듣지도 않고가버린 나쁜 순돌이 똥개 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