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상처이상인 명옥헌 배롱나무들이울컥울컥 꽃을 토해내고 있다. 그래 꽃을 피운다는 것은 제 몸 어딘가에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그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처절하게 아름다운 꽃을 뱉어낸다. 우리는 누군가 오래 견디다가아프게 뱉어낸 꽃들이다.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등단-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제5회 송순문학상 수상. 광양중마초 교장.
찔레 덤불 속의 둥지이상인 저 좁은 단칸방에서새끼 다섯을 낳아 길렀지아무리 열심히 물어다 날라도입을 쩍쩍 벌리며 아우성 열심히 나는 공부를 하고형제간에 우애도 깊었던그놈들, 지금은 무사히 다 커서훨훨 자유롭게 날아다니는저 푸른 세상 올려다보며 사네. 다 떠나보낸 단칸방이세월의 가지에 간신히 매달려전화 오기만을 기다린다.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등단-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제5회 송순문학상 수상. 광양중마초 교장.
새벽 기차이상인 거실 소파에 누워있는데머리부터 발끝까지 뼈마디를 짚으며기차가 지나간다. 만날 수 없는 나와 내가 쭉 뻗어있고그 위로 나는 늘 떠나가고 있었던 것 한때 나는 삶이한곳에 머물다가 떠나는 것인 줄만 알았다. 혼자서 생각의 침목을 되짚어보며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인 줄 알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지쳐 잠들었거나깨어 골똘히 생각하는 이웃들과 함께가끔 비켜나라고 빽 소리 지르며 정말 빠르게 나를 지나가는 중이라는 것을새벽의 끄트머리에서 깨달았다. 거실 소파와 가구와 집들이나의 아픈 뼈마디를 짚어보며 빠르게정말 빠르게
탱자 가시 이상인 탱자는 제 가시에 찔리지도 않고잘도 큰다.가끔 내 가시에 내가 찔려서아파할 때가 있다.살아가면서 만든내 곪은 상처를 따고 치유하기 위해품은 가시를 잘 벼려놔야 한다. 이상인 약력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등단-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제5회 송순문학상 수상. 광양중마초 교장.
푸른 시누대 이상인 꼿꼿하게 무리지어 서 있는 그대들을 바라보면누군가의 가슴을 서늘하게 뚫고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난다. 먹물 같은 시대의 어둠을 가로질러 새벽의 찬 이마에 꽂혀일순 파르르 떠는 빛나는 살들이 보인다. 언젠가 심중에 자신을 명중시키기 위해쑥쑥 키우는,고뇌에 찬 기다림의 세월들 사락사락 당겨진 푸른 살들이 세상 한가운데로 무수히 날아가고하나가 내 가슴 한복판에 곧게 꽂혀 꿈틀꿈틀 살아있게 한다. 이상인 약력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등단-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
자벌레이상인산행 중에 자벌레 한 마리 바지에 붙었다.한 치의 어긋남도 용납하지 않는 연초록 자자꾸 내 키를 재보며 올라오는데가끔 고갤 좌우로 흔든다.그는 지금 내 세월의 깊이를 재고 있거나다 드러난 오장육부를 재고 있을지도 모른다.혹은 끈질기게 자라나는 사랑이나 욕망의 끝자락까지또 고갤 몇 번 흔들더니 황급히 돌아내려 간다.나는 아직 잴만 한 물건이 못 된다는 듯이잰 치수마저 말끔히 지워가며이상인 약력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등단-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둥근 하늘이상인 나비 한 마리가 무밭을 뒤집다.손바닥 푸른 손금 안에, 생각을 낳는지소리도 없이 몇 초씩 머물러서내 등허리 간지럽다.문득 어깨를 들썩여보니노란 알에서 깨어난 추억들이 스멀스멀 기어 다닌다.얼마를 아슬아슬 디디며 견디어야둥근 하늘에 구멍이 뚫리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나나부끼는 생, 몇 장 독파하고 나니펼치는 힘찬 나비의 날개 짓허공에 물결무늬 투명하게 새겨진다. 이상인 약력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등단-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제5회
팥죽이상인 막 땅의 살가죽을 뚫고 나온연둣빛 새싹들의 숨소리를 떠먹는다.시도 없이 가슴 살랑이던 새소리숨 턱턱 막히던 무더위를후후 불어가며 연거푸 떠먹는다.바늘처럼 따갑게 쏟아지던 소낙비대책 없는 청개구리들의 울음소리싱거운 반찬으로 두어 번 집어 먹는다.잘 마른 가을마당 가시간의 작대기로 탁탁 두들기는 이의정성과 톡톡 튀어 달아나는풍성한 웃음소리, 훌훌 들이 마신다.숟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서려는데아쉬움처럼 바닥에 선명하게 내비치는아직 다 떠먹지 못한 붉은 노을이여. 작가 소개 / 이상인 - 약력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