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둔사 납월홍매
이상인
겨우내 남의 곳간에서 씬나락 까먹다가
절간 뒤에 곤히 잠들어 있던 구신들
잠시 몸 빌려 꽃눈을 뜨고
세상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중이다.
홍조를 띤 얼굴이 그럴듯해서
사람들이 많이 걸려들어 발걸음을 놓는다.
살얼음 낀 겨울 뒤끝,
구신들이 펼치는 연의 그물에 걸려든 이들이
그동안의 아픈 상처를 싸매고
애타는 간절한 눈빛으로
떠나간 사랑을 떠올리며 불러들이기도 하고
다가올 액운과 행운을 가늠해보며
손 모아 기도하듯 사진으로 남기는데
어느덧 세상 구경하던 구신들 무료해져
절 공양간으로 몰래 들어갔는지
꽃들이 시들시들 이내 떨어져 내린다.
예부터 구신에게 몸 빌려주면
부실한 과실을 맺는다고 하더니
음력 섣달, 너무 일찍 피고 시들어
주술이 풀린 듯 마음마저 색이 바랬다.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 2020년 『푸른사상』 신인문학상 동시 당선
-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 제5회 송순문학상 수상. 진상초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