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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2023 독서일기.15 -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 입력 2023.01.18 09:11
  • 기자명 장옥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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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를 찾아낸 인간 정신의 승리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청아출판사/11,700원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청아출판사/11,700원

내가 원했던 것은 독자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만약 강제 수용소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이것이 입증된다면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겪은 일을 기록해 놓을 책임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9쪽

이 책은 니체가 말한 한 문장을 증명한 책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니체 '삶의 의미'가 갖는 엄청난 힘을 증명한 정신과 의사의 실존적 기록으로 인류 역사에 영원히 남을 위대한 고전이다. 부모와 아내, 형제를 모두 잃는 형언할 수 없는 죽음의 계곡에서 살아 남은 처참한 경험을 역사로 남긴 불후의 명작이다.

두 번째 읽기를 선택한 책이라 이미 내용을 알고 있음에도 작가의 슬픔에 공감하며 몇 번이나 읽기를 중단해야 했다. 처절한 슬픔을, 형언할 수 없는 상황을 너무나 담담하게 묘사해서 더욱 슬펐다. 내가 픽션보다 논픽션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논픽션이 지닌 진실과 사실이 주는 감동!

극한 상황을 직접 겪고도 트라우마에 시달리지 않고 오히려 비극적인 상황을 환자들을 위하는 정신적 치료제로 전환시킬 수 있는 위대한 정신력의 승리자, 세상에 진실을 알리면서도 객관적인 묘사로 담담히 그려낸 차분하고 냉정한 서술. 엄혹한 살인의 현장에서 인간의 심리를 그처럼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전문적 소양, 따뜻한 가슴으로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의 유형을 철학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니!

30년 전 유태인 학살 영화 '쉰들러 리스트' 를 보며 슬픔의 도가니에 빠져서 영화관을 나오지 못했던 그 충격적인 영상들! 오래 전 기억을 반추하며 다시 읽기를 선택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다시 슬퍼지기 싫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장면이 실제 이야기였음을 증명이나 하듯 처참한 광경들을 상상하며 읽는 것은 슬펐다. 나는 간접적인 아픔을 겪는 게 싫어서 폭력을 다룬 영화나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고전이고 인류의 역사가 영원히 간직해야 될 기록물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책이다. 만약 인생의 도로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지경에 꼭 읽어야 할 책 한 권이 있다면 이 책이다. 삶을 포기해야 할 만큼 사는 게 힘든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도 이 책은 죽음을 이기는 항생제 역할과 마음의 아픔을 잊게 하는 모르핀 역할을 해주리라 확신한다.

이보다 더 슬프고 비참한 세상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므로. 다른 이의 불행을 보며 그래도 그보다는 나은 현실을 위안을 받으며 재기할 힘을 얻을 지도 모른다. 노숙자의 현실도, 도망자의 불안도, 교도소의 사형수나 무기징역을 사는 이도 먹을 것이 없는 아프리카의 어린아이도 죽음의 수용소보다 나으리라.

빅터 프랭클은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부모, 형제, 아내를 모두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잃었고, 그 자신도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추위와 굶주림, 폭행 그리고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삶의 의지를 되새기며 마침내 살아남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간의 적나라한 악의를 목도하고 경험했으면서도 인간에 대해 따스한 마음과 희망적인 시각을 견지했다는 것이다. 온갖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낙관적으로 대처하고 그리하여 곧 희망을 찾아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출판사 리뷰 중에서

죽음의 수용소는 아직도 있다

우리 인간은 출생과 동시에 이미 거대한 죽음의 수용소에서 사는 존재다. 다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라는 불편하고 슬픈 진실을, 사는 동안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실을 깨닫게 한 책이다. 이 세상의 어떤 죽음도 아우슈비츠에서 자행된 처참한 죽음만큼 비극적이지 않다. 인간의 잔인할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준 그 비극의 한가운데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으며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의 기록물.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어디선가, 이 나라의 곳곳에서 원치 않는 억울한 죽음들은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다. 재난사고, 천재지변, 건설 현장, 교통사고, 질병, 범죄 피해자가 저지르는 사건사고. 때로는 육체의 질병보다 더 무서운 내면의 틀에 갇혀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한 질주이기도 하다. 극단적이고 우울하게 표현한다면 죽기 위해 사는 삶이다. 인생은 고행이라며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자가 더 복 있는 자라고 했던 붓다의 일갈은 불행한 삶의 연속선에서 한 발로 나아가지 못한 채 병마에 찌들고 가난에 찌든 사람, 어느 곳을 봐도 희망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인생에게는 설득되는 가르침이다.

더 멋진 웃음, 아름다운 죽음, 치욕적 죽음, 역사에 남을 죽음, 피맺힌 죽음, 원치 않은 죽음 등 다양한 죽음이 존재할 뿐. 우리 모두는 죽음의 행진곡에 날마다 발을 맞춰 가는 중이다. 그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 잊기 위해, 죽지 않는다는 교리가 인간을 유혹하기도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모멸감을 안겨주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죽음의 수용소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일하는 사람들, 학대를 일삼으며 언어폭력을 달고 사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으니 현실판 죽음의 수용소는 널려 있지 읺은가!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 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109쪽

이 책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가 타이틀이지만 참혹한 순간에도 삶과 존재의 의미를 찾는 인간의 숭고한 모습에 더 주목받는 책이다. 작가의 의도는 거기에 있다. 참혹한 수용소의 죽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삶의 의미 찾기'에 있다.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지 않고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게 인생이다. 내일 형장의 이슬로 가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은 깨끗하게 면도를 한 사람이 죽음을 면하는 모습은 눈물겹다.

삶의 의미와 의지를 보인 덕에 살아남는 모습은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 책에 숨겨진 은유적 표현이다. 인생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누구나 죽음을 향한 도로에서 열심히 살고자 애쓴다. 그 삶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 죽음 이후의 존재를 의심하며 절망하기도 한다. 

빅터 프랭클은 인류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 자신이 이 책으로 얻은 명성보다 훨씬 더 인간의 잔혹성과 무도한 정치가가 어떻게 악마가 되는지, 그 대열에서 함께 가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보여준 '악의 평범성'에 치를 떨게 한다. 이보다 더 잔혹한 인간의 역사가 있었을까! 아직도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 억울한 죽음들이 널려 있으니, 우리가 사는 이 지구는 '죽음의 수용소'의 연장선에 있다.

이 책의 2부에는 빅터 프랭클이 창시한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이 실려 있다. 로고테라피는 '환자가 삶의 의미와 직접 대면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깨우치게 도와주는 것이 정신병을 극복할 수 있도록 환자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 이름하여 제3정신 의학파로 불리며 현대 정신의학에 새로운 물줄기를 열었다.

나는 이 책을 두 번째 읽으며 몇 가지 질문을 하게 되었다. 만약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토록 처절한 죽음의 순간들을 체험하면서 정신과 의사가 아닌 일반인으로 그런 일을 당했다면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냉정한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의 전문직은 위험한 순간에 도움을 준 적이 없었을까? 수용소 생활을 끝내고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트라우마에 시달리지 않은 것은 정신과 의사였기 때문이 아닐까? 답은 하나다! 그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가 극도로 위험한 순간에 정신줄을 놓지 않게 된 것은 정신과 전문의로서 마음의 벽이 일반인들보다 여러 겹으로 무장되어 있었을 거라는 확신이다. 그런 비극을 겪는 사람들은 나머지 생을 트라우마에 묻혀 비극적으로 살기 때문이다. 인간 정신에 대한 연구, 악한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눈으로 위기의 순간을 넘기며 살아 돌아온 이후 그것을 기록하려는 실존적 욕구는 그를 제2의 인생을 살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그러니 정신과 의사였기에 가능했을 이 책의 가치는 더욱 높아진 것이다.

비극 속에서도 낙관을, 실존적 공허 속에서도 실존적 존재 의지를 가슴에 품고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는 수많은 환자들을 위한 로고테라피의 창시자가 된 그의 일생에 대한 평가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고귀한 품격을 지닌다. 그는 정신과 의사를 넘어, 작가이자 교수를 넘어 인간 정신의 위대한 승리자로서 위인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손색이 없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맑고 선한 모습으로 임종했다는 그의 아름다운 영혼이 안식에 들었기를! <죽음의 수용소에서> 덕분에 내가 살아야 할 이유, 삶의 의미를 다시 찾아 신발끈을 단단히 묶고 나선다. 그러니 그대도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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