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지꼬지 선돌 이상인 한 남자를 오래도록 사랑하였네 그이가 오신다는 소문에맨발로 뛰어나와 파도를 맞고 있네지나간 세월이 너무도 멀어이젠 수평선처럼 아스라하네 어느덧 애타는 그리움이거나아직도 지칠 줄 모르는 출렁거림이내 온몸을 갉아먹고 사네나는 날마다 시퍼런 바닷속으로무너지듯 잠겨가고 있네 무릎이 잠기고 어깨가 잠기고꼬시래기 같은 머리카락만 남아푸른 물살에 휩쓸리며 기다리겠네 나 한 남자를 지겹도록 사랑하였네 하, 그 많은 기다림의 시간날마다 뜨고 지는 해와 달이쪼개지고 금 간 가슴에 새겨주고 가네
자리를 잡고 앉는다집에 대한 애착실없고 내밀한 형태의 소음쌓인 추억의 내음치덕치덕 발목 붙잡는 우울은우리의 터전이 감쌌습니다 한 철 예쁘게 존재했을 텐데이 공간도 내 마음도예쁜 것만 고집하다버림만이 남은 내가 미워집니다 기억하십니까두고 나온 집 지붕의 색을아리도록 화사했던 추레함을
산두꺼비 알 이상인 엄마 아빠는산두꺼비 알을 낳아 놓고산으로 떠나가고 우주복을 입은 알들은까만 눈을 뜬 채물살에 흔들린다. 앞으로 이 산골짜기를가득 채울아름다운 노래가빼곡히 녹음된 알들 엄마 아빠가 안 계셔도무럭무럭 잘 자라너도나도 멋진 노래를한껏 뽐낼 것이다.
와온 여인숙이상인 바다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그의 어깨를 가만히 껴안았다.그제야 그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바다는 말없이 눈물을 닦아 주었다.바다의 눈시울도 젖어있었다. 그가 힘껏 거머쥐려고 했던 세상과걸어왔던 사랑과 고통의 길들이눈물 속에 비쳐 보였다.바다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돌아누워 들썩이는 그의 어깨를다독이고만 있었다. 그도 이제는 바다가 되어하루 내 잔잔하게 출렁이고 싶어졌다.아름답게 떠오르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하루를 비워내고 가득 채우고 싶었다. 바다가 그의 손을 꼭 잡아주자어느덧 흐느낌이 썰물처럼 다 빠져나갔다.그는
흰 무덤 두 개이상인 저녁 10시쯤아내가 출출하다며찐빵 두 개를 밥솥에 넣었다. 꺼내려 뚜껑을 열어보니거기 잘 익은 흰 무덤 두 개가나란히 놓여있다.그동안 살아오면서둥글고 아름다운 무덤나란히 빚어온 것인가?선산에 계시는 부모님이 생각났다. 따끈따끈 잘 데워진 흰 무덤 하나씩맛있게 나누어 먹고우리도 이제 함께 자러 갈 시간이얼마 안 남은 것 같네라고 아내에게 말하자평소 하던 데로당신 방에서 주무시지요방문을 휙 닫고 들어가 버렸다.
모슬포항 요령 소리 이상인 제주 모슬포항에서방어회에 한라산을 마신다.밖은 어둠이 비에 젖어 내리고내일은 마라도를 들어가야 하는데흰 거품을 문 파도가 거세다. 마라도 할망당에서한판 벌어지고 있는 굿판애기업개의 혼이 머릴 풀어헤치고날카로운 칠석명도를 휘두르며바닷속을 뒤흔들어 놓는 것이리라.하지만 내 몸속으로 들어온 방어가힘센 지느러미 흔들며나를 마라도로 이끌어 갈 것이다. 같이 온 여자는 한잔 술에 자울고마라도 마라도 그리 마라라 마라라마지막 술 한잔을 오래 따를 때모슬포 한쪽 귀퉁이가쩌렁쩌렁요령 소리에 휩쓸려가고 있었다.
길/ 이상인 산길은 산이 자기 허리를잠시 내어준 것이다. 나도 이때껏누군가 내어준 길을 걸어온 것처럼 누군가에게든든한 길 하나슬그머니 내어드리고 싶다.
목각 인형/ 이상인 사람의 형상이 되기 이전에는그는 어디에 있었을까? 아름드리 느티나무나비탈길 간신히 서 있던 단풍나무의배꼽 혹은 종아리에 숨어 있었을지도 어느 솜씨 좋은 나무 조각가가그를 대뜸 알아보고세상 밖으로 끄집어내 준 것인데 지금도 그는 기억한다.수액을 열심히 펌프질하던 초여름과눈보라 치는 허허로운 들판인연처럼 날아오고 날아가던 새들을 그것들은 그의 가슴에 혈흔처럼 남아서목각 인형이 되기 이전으로절뚝거리며 자꾸 걸어가게 한다. 작가 소개 / 이상인- 전남 담양 출생-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 2020년
한라산 고사리이상인 누군가 캄캄한 저쪽 세상에서이쪽 세상으로 손을 쑥 집어 넣어본다. 꼭 쥔 손이 앙증맞다.무얼 잡아보겠다는 듯무얼 쥐어보겠다는 듯그러나 이내 손바닥을 쫙 펴 보인다. 지금까지세상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여기저기 더듬어 보아도내가 쥘 만한 것은 없었다. 이제 캄캄한 저쪽 세상으로불쑥 손을 넣어보고 싶다.
모슬포 등대이상인 깜박깜박 잊고 산다는 것참으로 즐겁고 고마운 일살아온 날들을 다 기억한다면이번 생이 얼마나 빡빡하고 힘들겠는가. 소중했던 일, 하찮은 일들도 기억의 심해 속에 가라앉혀 두어야자기 스스로 살아남아서눈 깜박일 사이 저렇듯 속 깊게 파도쳐보는 것이리라. 깜박깜박 잊고 산다는 것깜박깜박 추억을 되새김하는 것이다. 작가 소개 / 이상인- 전남 담양 출생-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 2020년 『푸른사상』 신인문학상 동시 당선.-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
진달래 화전이상인 진달래 화전 두 개급하게 꿀꺽 삼켰더니속에 불이 났다.급히 몸속의 불을 끄다 보니온 세상으로 불이 번졌다. 이 아름다운 봄날!진달래 화전 두 개가온 산천을 다 태워 먹고 있었다.
화살나무이상인 그동안 내가 쏘았던 사랑이여기에 다 모여 있네설레던 활시위를 잡아당겨부르르 온몸을 떨며 날아간내 사랑들이여! 겨누었던 과녁한 심장에 깊숙이 꽂혀 있었네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내 심장에 층층이 박혀붉게 부르르 온몸을 떨고 있네
그대 고운 마음 꽃으로 피더니뜨겁게 살라는 그 말 핏빛 붉은 가슴 드러내고 서서산책 길 다독이는 너의 비원오늘도 받아 적으며 하루를 연다. 온 마음 다해긴긴 겨울 홀로 견딘 너세상이 뭐라 해도비바람에 가지가 찢겨도 올곧은 마음 한 자락 붙잡고서그토록 기다리던 이 봄날에가신 님 그리며 속울음으로 피워낸뜨거운 너의 합창 떨어진 네 가슴 한 조각두 손에 꽃 무덤 하나내 가슴엔 네가 남긴 유언 한 줄 너처럼 뜨겁게 살아달라는 그 말너처럼 처절하게 살아내라는 그 말너처럼 절절하게 사랑해 달라는 그 말에다시 일어서는 4월 어느 날 아침 4월에
등나무 꽃타래의 편지 4월 끝자락에 서서 지금 막 피워 올린나의 보랏빛 향기를 그대에게 보냅니다. 고개 숙인 채 윙윙 대는 꿀벌님힘들어하는 그대에게도 나의 향기를 보냅니다. 포도 알처럼 풍성한 송이마다가득한 달콤한 향기가 그대를 숨 쉬게 하기를 파란 도화지 하늘 가슴에 품은 고운 내음에그대의 슬픔도 살을 에는 고통도 한 순간에 잊으소서! 슬픔 뒤에 오는, 고통 뒤에 맞이한나의 향기를 기다려준 그대를 축복합니다. 무서리 내리던 늦가을도휘몰아치던 혹독한 지난겨울도눈물 머금고 이겨낸 그날들 그대도 나도4월의 눈부신 꽃입니다지금 이 순간이
비 오는 날의 기도 그는 단비였다. 메마른 영혼에 하늘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그는 봄비였다. 메마른 뿌리에 생수를 부어주고 웃어주었다.그는 세상이었다. 불편한 몸을 기댈 어깨를 내어주고 지팡이를 안겼다.그는 학교였다. 눈이 먼 마을에 등불을 들고 달려와 준 스승이었다.목련꽃 피던 날, 봄비로 다가오더니 지는 꽃잎에도 그대 숨결도 숨었구나.
하늘을 나는 난꽃들이상인 며칠 마음 비운 사이향기로운 새 울음소리 자옥하다.평생 집을 짓지 않는다는 기러기낭창낭창 휘어지며 줄지어 날아간다. 끼룩끼룩진한 향기 온 하늘에 흩뿌리며본향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맨 뒤에 따라가는 어린 두 녀석초행길이라 긴장했는지 입을 굳게 다물었다.요놈들도 곧 만개하리라. 작심한 듯 뼛속까지 다 비우고하늘을 가벼이 건너가는 이들에게선늘 맑고 향기로운 소리가 난다.
순천만 철새들이상인 뻘밭에 모여 있을 땐이리저리 헝클어진 실처럼어지러워 보이다가도 땅을 박차고 하늘을 날 땐실타래에서 술술실이 풀어져 나오듯이새들이 한 줄 두 줄 날아오른다. 대장 신호에 맞추어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소곤소곤 귓속말을 주고받으며힘차게 날아간다. 서로서로 도와주고힘을 북돋아 준다면거뜬히,저 푸른 하늘을 날 수 있다는 듯이
서귀포 유채꽃 이상인 땅속에 잠든 정령들이일제히 깨어나 봄 바다를 바라본다.바다가 일렁일 때마다 철썩철썩 함께 흔들린다. 새우 멸치 도다리 가자미 넙치 장어우럭 광어 청어 민어 상어 고래들의죽은 혼들이 몰려와봄이면 유채꽃으로 노랗게 운다.울다가 본향의 바다를 바라보며날마다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자유롭게 헤엄치며 떼 몰려다니고바닷속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던 물고기들노랗게 흔들리는 그 속에 서면이상하다, 나도 같이 흔들린다.흔들린다, 자꾸 출렁거린다. 두 발끝을 가지런히 모은 채 언젠가 맘껏 등지느러미 흔들어대던 숨찬 기억들한없이 유
망주석이상인 손발 묶어두고생각마저 꽁꽁 싸매두고무심한 부처처럼한 천 년쯤 서 있고 싶다.
수 많은 시간 수고로움을 감내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선 하디 선한 눈망울 하나 틔웠습니다. 그리움 가득 안고 선 이 봄날화 사하게 얼굴 내밀 그날이 왔습니다. 화르르 지는 날이 와도 울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