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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무정리 정류소 / 이상인

  • 입력 2023.12.05 13:32
  • 기자명 이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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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정리 정류소

    이상인

 

   삼거리 가에 엉거주춤 서 있는 그는 늘 무료하여 꾸벅꾸벅 졸았다. 졸다가도 띄엄띄엄 오는 군내버스 시간을 용케 기억해 내고는 부스스 눈을 뜬다. 고개를 길게 빼고 산모퉁이를 돌아오는 버스를 바라본다. 번번이 타는 손님이 없어 버스는 정차하지 않고 곧장 읍내로 내달렸다. 멀어지는 뒤꽁무니를 무연히 쳐다보다가 하품을 두어 번 하고는 다시 졸기 시작한다.

   오늘은 읍내 장날이라고 할머니 서너 분이 아침 일찍부터 서성거리신다. 정류소도 신이 났다. 서로 안부를 묻기도 하고 서울 사는 아들딸들의 이름도 뒤섞인다. 모두가 이 정류소를 거쳐 학교를 졸업하고 도회지로 나갔다. 해맑은 얼굴에 갈래머리, 즐겨 입던 옷과 책가방을 기억해 내고는 정류소도 살짝 미소를 짓는다.

   오후 한나절 참새 떼 두어 번 쉬었다 가고 저물 무렵 장에 가신 할머니들이 내리신다. 축져진 가방이 할머니들을 부축하며 동네 길을 따라 집으로 들어간다. 건강히 지내시라고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정류소가 손을 흔든다. 서너 집은 간신히 불이 켜지고 두꺼운 어둠의 이불이 몇 겹씩 마을을 뒤덮는다. 죽음 같은 그 고요를 바라보다가 정류소도 강아지처럼 웅크리고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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