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 심경心經
/ 이상인
산길에 고라니 한 마리
드디어 갈 길 다하였는지 엎드려 있다.
고요한 선정에 든 듯
며칠을 꿈쩍하지 않더니
얼굴 하나 찡그림 없이 내장을 다 내주었다.
가죽과 뼈만 남기고
어미 개가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듯이
배고픈 산짐승들에게 차례로 내주었다.
고라니는 혀만 살짝 빼물었을 뿐
미동도 원망도 없이 고루 나누어 주었다.
굶주려 힘없던 짐승이
힘차게 산등성을 뛰어넘고
가시밭길을 헤쳐 나갔을 것이다.
고라니 자신이 그동안 달게 받아먹었던
풀잎과 나뭇잎과 눈부신 아침 햇살
가끔 목을 축이던 계곡물을
그저 되돌려 주었을 뿐.
우리도 지나온 길을
가만히 더듬어 보면
고라니 같은 한때를 보낸 적이 있다.
작가 소개 / 이상인
- 1992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 당선, 2020년 『푸른사상』 신인문학상 동시 당선
- 시집 『해변주점』『연둣빛 치어들』『UFO 소나무』『툭, 건드려주었다』『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 제5회 송순문학상, 우송문학상 수상. 진상초등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