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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방향에 큰 수술이 필요한 이유

진짜 공부는 온 정신을 아찔하게 한다.

  • 입력 2021.05.31 08:18
  • 기자명 김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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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본질은 까맣게 접어 둔 채 직업을 찾는 공부만 강요하니 배움이 어찌 즐겁겠는가?
삶의 본질은 까맣게 접어 둔 채 직업을 찾는 공부만 강요하니 배움이 어찌 즐겁겠는가?

 

 

삶은 무엇일까? 공부는 재미있는 것일까? 왜 살면서 공부를 해야만 할까? 그 누구도 분명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만큼 우린 삶과 공부에 대하여 진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어디에서 찾아야할까? 평생공부가 아닐까 생각한다. 공자는 논어의 첫머리에서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삶과 배움을 이야기 한다.

 

그는 배우면 마음이 흡족하다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주자는 배움의 즐거움을 다음과 같이 새의 날개짓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새는 처음부터 하늘을 날 수가 없다. 매일 매일 날개 짓을 반복하다보면 점프 능력이 생기고 위로 날 수 있는 날개의 힘을 기를 수 있다. 그 익힘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늘을 날 수 있다. 그때 그 희열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바로 이것이 배움의 흡족함이다."

 

삶에서 배움은 새의 날개짓처럼 개개인이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다양한 경험과 시행착오를 겪으며 하나 둘 알아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삶과 배움은 어떠한가? 우린 삶의 본질이나 이해를 생략한 채 오직 삶을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공부를 한다. 삶의 본질은 까맣게 접어 둔 채 직업을 찾는 공부만 강요하니 배움이 어찌 즐겁겠는가?

 

부모가 학교를 다녀온 자녀에게 묻는다고 가정하자. A라는 부모는 "오늘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니?"하고 묻고, B라는 부모는 "오늘 어떤 질문을 했니?"라고 묻는다. A라는 부모는'어떻게'를 통해 정답을 찾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B라는 부모는'왜'라는 질문을 통해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왜'와'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하여 좀 더 이야기해보자.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배운다고 가정해보자.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이 즈려 밟고 가시옵소소.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눈물 아니 흘리오리다."

'왜'라는 질문의 유형은 이렇다. "왜 임이 떠나는데 말없이 그냥 보낼까요? 왜 떠나는 임에게 꽃을 뿌려주죠? 왜 떠나는 임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다짐하죠? 우리 각자 생각을 정리해서 말해보기로 해요?"

 

다양한 답이 나올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부터 이별 그리고 질투, 성숙 등등 개개인의 경험과 배경지식에 의해서 수많은 상황들이 생생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렇기에 답은 하나가 아니가 여러 개 일수가 있다.

 

 

사람은 다른 색깔과 모양으로 살아간다.
사람은 다른 색깔과 모양으로 살아간다.

 

 

'어떻게'라는 질문의 유형을 생각해보자. "임이 떠나는데 나는 어떻게 보냈죠? 떠나는 임을 위하여 무슨 꽃을 뿌렸죠? 나는 눈물을 흘렸나요? 그렇다면 주제가 뭐죠? 임과의 이별의 슬픔이죠? 그런데 반어법을 사용하여 마음을 반대로 말한 것 같죠. 결국 보내기 싫다는 의미입니다. 아! 그리고 머리와 꼬리가 유사한 말을 반복하고 있으니 수미상관 구조이네요. 알겠죠. 기억하세요."

 

다양한 답이 나올 수가 없다. 일방적인 가르침이 되어 배우는 사람은 그냥 그 지식을 또박또박 머리에 기억할 뿐이다. 사람의 삶은 다른 색깔과 모양을 갖고 있는데 이 시에서는 하나의 답만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어떻게'라는 질문 유형은 학습자에게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들다. 그러나'왜'라는 질문 유형은 배우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 삶에 대하여 생생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전자처럼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는 것과 후자처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공부 방식은 배우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에도 큰 영향을 준다.

 

흔히 말하는 창의력은 무엇인가? 생각에 생각을 더해 또 다른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즉 '엉뚱한 생각이요, 그럴싸한 생각이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라는 것이다.'

 

'왜'라는 배움의 시간을 갖는다면 자신의 이별 이야기를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친구, 고모, 부모 그리고 영화 속의 주인공의 이별 장면에다 또 다른 상상의 날개를 더할 수 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도 말했지만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도 지식에 대해서 유사한 말을 한다. "현재 학교에서 배우는 것의 80퍼센트 이상은 곧 필요 없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100세까지 평생학습을 해야 한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교육현장을 엿보면 '왜'라는 공부 방식보다 '어떻게'라는 공부 방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 아이들이 그 수업의 결과를 고스란히 떠안고 가야 할 운명일까?

 

 

아이들이 그 수업의 결과를 고스란히 떠안고 가야 할 운명일까?
아이들이 그 수업의 결과를 고스란히 떠안고 가야 할 운명일까?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사고를 하는 기성세대가 많다. 그것은 그들이 살았던 삶과 교육의 결과물임을 알면서도 삶과 배움을 좁게 해석하는 일상이 안타깝기만 하다.

 

기성세대여! 지금도 배움의 목적이 명문대 입성과 출세에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이들을 두 번 죽이는 것이다. 시대와 동떨어진 배움의 방향과 공부 방식에 큰 수술이 필요함을 말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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