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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가을 앞에서

날마다 새로운 날이다

  • 입력 2021.11.08 15:57
  • 기자명 장옥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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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글과 불멸의 글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완벽한 글은 단어 하나만 고쳐도 그 전체가 무너지는 글이어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면 뉘앙스가 사라진다. 반대로 불멸의 운명을 타고난 글은 오탈자, 오역, 오독, 몰이해의 불길을 통과하며, 갖은 시련에도 영혼을 방기하지 않는다." 고 했다

이 인용문을 읽으니 글이 마치 인격을 지닌 사람 같다. 완벽한 사람과 불멸의 사람! 완벽한 사람은 평생을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완벽함을 추구하며 노심초사하며 빈틈없이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위 중 단 한 가지만 잘못되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완벽하게 살기도 정말 어려운 일인데.

불멸의 사람은 죽어서도 잊히지 않는 혼으로 남은 사람일 것이다. 결코 쉽게 살지 아니한 사람일 것이다. 노자는 `'죽어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이다'(死而不忘者壽)`라고 했고 <논어>에는 `인자수(仁者壽)`라는 말이 나온다.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는 뜻이다. 불멸의 사람은 예수나 공자, 부처와 같은 사람이리라.

보르헤스의 문장론을 접하니 글쓰기가 두렵다. 솔직히 글을 쓴다고 내놓고 말할 수준도 안 되는 잡문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저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으니 쓰지 않은 날은 어깨가 축 처지고 힘들다. 가상공간이지만 나의 존재를 스스로 느끼고 싶어서 쓴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단 한 문장이, 낱말 하나가 마음밭에 뿌려질 그날을 기다리며 하얀 화면에 씨앗을 뿌리는 중이다.

불멸의 글로 불멸의 사람이 된다면 가슴먹먹하도록 기쁠 일일 것이다. 그런 축복을 받은 이들이 남긴 훌륭한 문학 작품은 역사가 지속되는 동안 사랑을 받으리라. 나처럼 재주가 부족한 평범한 사람조차 쓰고 싶어 하는 글쓰기. 문학인을 꿈꾸며 팔리지도 않는 책을 여러 권 출간하고도 스테디셀러를 갖는 꿈을 접지 못하고 있다. 

바다에 사는 수많은 물고기 가운데 유독 상어만 부레가 없다. 부레가 없으면 물고기는 가라앉기 때문에 잠시라도 멈추면 죽는다. 그래서 상어는 태어나면서부터 쉬지 않고 움직여야만 하고, 그 결과 몇 년 뒤에는 바다 동물 중 가장 힘이 센 강자가 된다.         -장쓰안 <나를 이기는 힘 평상심> 중에서

어쩌면 내 인생은 부레 없는 상어와 같았다. 인생의 바다에서 부레 없는 상어처럼 태어난나는 쉼없이 일해야 했다. 일하는 것만이 가족이 살 길이었다. 공부하는 일은 사치였고 연로하고 아픈 부모님은 내가 감당해야 할 운명이었다.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헤엄치고 숨 쉬며 살 수 있는 내 유년의 시간 속에는 부레가 없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상어처럼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했기에 제대로 된 배움의 기회가 없었다. 혼자 찾아나선 배움의 길에서 하늘의 도움이었는지 합격해서 직장인이 되었다. 그러니 나는 모르는 게 많았고 늘 배우는 자세로 살았다. 정규대학을 나온 선생님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내 반 제자들에게 불이익이 가지 않게 하려고 배우고 또 배우며 책을 읽었다.

의무가 아닌 연수도 찾아서 했고 수업공개도 나서서 했다. 제대로 영어를 배우지 못했지만 영어수업 장학요원도 했다. 승진을 위한 연구 점수가 꽉 찼지만 승진에는 뜻이 없었다. 살아 남기 위해 달리고나니 어느 새 흰 머리 가득한 노인이 내 앞에 서 있다.

기록을 남기고 싶은 인간의 염원이 그림을 그리고 문자를 발명하게 했으리라. 나 또한 나를 남기고 싶은 발로에서 글쓰기에 집착한다. 41년 공직생활을 뒤로 하고 세상으로 나오니 모든 게 어설프다. 내가 현실 속에 살아 있는지 실감이 안 난다. 마치 미생(바둑에서 삶과 죽음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처럼.

나는 감정노동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인간관계로 살고 있다. 휴대폰은 최대한 켜지 않는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시시콜콜 불러내는 소음이 싫어서다. 전화기만으로도 충분했던 시절이 좋았다. 휴대폰을 끄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 특유의 가족이나 이웃 등의 시선에 신경을 쓰고 비위를 맞춰야 하는 감정노동에서 오는 피로감이 없어 좋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아끼고 깨어 있는 시간을 소중히 하며 살고 싶다.

우주적인 시간에 비추면 나의 현생은 순간(눈 깜짝할 사이)도 찰나도 아니다. 찰나는 불교 용어다. 산스크리트어의 '크샤나'를 음역한 것이다. 불교 경전에 따르면 '가는 명주 한 올을 젊은 사람 둘이서 양끝에서 당기게 하고 칼로 끊었더니 실이 끊어지는 시간이 64찰나였다고 한다. 1찰나를 현대 시간으로 환산하면 대략 75분의 1초라고 한다. 오늘날 사용하는 수학적 언어나 일상 언어는 불교 용어에서 비롯된 것이 많음을 생각하면 불교의 깊이에 놀란다.

미국 시인 마야 안젤루는 "인생은 숨을 쉰 횟수가 아니라 숨막힐 정도로 벅찬 순간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로 평가된다."라고 했다. 그 말은 감동하는 삶이다. 교직에 있을 때는 그런 순간이 참 많았다. 앎의 기쁨을 보여주던 제자들의 빛나는 눈빛! 특히 청출어람을 보여준 제자를 보는 일은 최상의 기쁨이었다. 

교단을 떠난 지금은 책을 읽다 탄복할 문장을 만날 때, 내가 쓴 글이 내 마음에 들 때 벅찬 순간을 맞는다. 산책하다 만나는 아름다운 풍경이나, 노랫말이 감동적인 노래를 들을 때, 외손녀가 새로운 말을 할 때도 벅차서 웃음을 참지 못한다. 우리 집 고양이, 꿈이가 보내는 사랑스런 눈키스엔 시간을 멎게 하는 마법에 빠진다. 

그러나 가장 벅찬 순간은 쓰고 싶은 글이 마음에 들게 써질 때이다. 그 순간이 찰나에 그치지만 그것이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곤 한다. 오늘도 나는 돗수 놓은 돋보기를 쓰고 벅찬 순간을 맞기 위해 길을 나선다. 가을이 깊어지듯 내 인생의 가을도 저문다. 빈 가지로 서 있는 나무들이 늘어간다. 깊은 사색에 잠긴 겨울나무는 벌써 새 봄을 꿈꾼다. 겨울은 끝이 아닌 시작이라고 속삭인다. 날마다 새로운 날이다. 저 겨울 속에 봄이 들어있다.

오늘은 다시 오지 않을 불멸의 날이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몸 단장을 마친 꿈이가 명상에 들었다. 녀석은 아침부터 나를 가르치는 중이다. 조용히 살라고, 조금만 먹으라고, 마음도 비우고 침잠하라고 이른다. 그것이 불멸의 시간을 사는 방법이라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녀석의 묘생이 부럽다. 소유에 눈이 어두워 불멸의 시간들을 보내버린 어리석음을 덜어내는 중이다. 촉촉한 가을비에 음악이 젖는다. 이제 보니 나도 가을이다. 가을은 갈 것을 생각하라고 붙인 기막힌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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