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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해요' 에서 '어,되네' 까지 걸리는 시간

한 3학년의 한글떼기

  • 입력 2021.04.13 13:42
  • 수정 2021.04.16 11:09
  • 기자명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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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기초학력보장지원단 협의회에 다녀왔다. 90분 회의에서 갑자기 내게 발언의 기회가 주어졌다. 내가 그렇게 말을 많이 할 줄 몰랐다. ‘그렇지만 엉뚱한 말을 더 많이 해버렸다!’ 깝죽댄 건 아닌지 부끄러웠다. 괴로운 시간이 지나고 오늘 아침. 어느새 그 자리엔 새 감정이 차올라 있었다. '진짜 하지 못한 이야기는 글로 남기면 되잖아' 하는. 그래서 이 글을 쓴다.

 나는 교육복지사다. 교육복지사는 부모의 경제적 형편에 초점을 맞추고, 현물을 지원하는 사회복지사와 다르다. 취약계층 학생의 교육적 성장을 도모하는 일을 한다. 더 쉽게 말하면, 학생이 취약한 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지역사회와 연계하여 자원을 발굴하는 일을 한다. 법정저소득가정· 한부모보호가정· 다문화가정 학생들과 기초학력부진학생, 담임추천학생 등이 대상이다. 어제 지원단회의에 합류하게 된 이유도 내가 ‘기초학력부진학생’과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3학년이었지만 한글을 못읽었다. 알림장은 글자를 그림처럼 그렸다. 수업시간에 종종 화장실을 다녀왔다. 체육시간을 가장 좋아하고, 말을 참 잘하는 육남매의 막둥이였다. 1학년 때 담임교사는 가르쳐주어도 뒤돌아서면 까먹는다고 했다. 2학년 담임교사는 교육복지학생으로 추천하였다.(구례중앙초등학교는 2018년도부터 교육복지우선지원사업학교가 되었다) 아이가 3학년 때인 2019년부터 집중지원을 시작하였다.(그때는 ‘기초학력책임교육’이 지금처럼 체계적이지 못했을 때이다) 

Wee센터, 특수지원센터와 연계하고,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을 오가며 각종 검사를 하였다. 그렇지만 난독증이 아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아이가 한글을 못읽은 가장 큰 걸림돌은 아이의 마음에 있었다. “난 못해요.”가 주로 하는 말이었다. 공부와 관련된 말만 나오면 “난 못해요.”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난 못한다니까요.” 해볼 필요도 없다는 당연한 믿음이었다. 이 잘못된 믿음을 어떻게 깨뜨릴 수 있었을까. 결과부터 말하면 아이는 3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한글을 띄엄띄엄 읽기 시작했다. 

 2019년 여름방학. 교육복지실에서 한글집중수업을 열었다. 그 아이만 3학년이고, 나머지 아이들은 1학년이었다. 아이가 자존심 상하지 않을까 하는 것은 염려였다. 자연스럽게 무학년제가 됐다. 하얀칠판 앞에 자음,모음 자석을 붙이는 놀이에서 후배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아이는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어, 되네!”란 말이 아이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상해요. 된다니까요.” 되는 것이 아이에게는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 너도 할 수 있다니까!” 강사님들과 함께 아이를 응원했다.

2021년. 올해 아이는 5학년이 되었다. 학기 초, 진단평가에서 국어과목 기초학력을 통과했다. 작년 한 해 동안 도움을 주신 구례교육지원청 학습클리닉 선생님이 가장 기뻐하셨다. “못해요”를 입에 달고 살던 아이가 “어, 되네!”를 경험하면서 작은 성공의 시간들이 쌓였다. 결국, 한글을 뗐고, 원하던 씨름부에도 들었고, 즐겁게 학교에 다니고 있다.

‘취약’의 반대는 ‘회복’이라고 한다. 취약한 부분의 극복에는 힘이 많이 든다. 그러나 피하지 않고, 문제와 씨름해가다보면, 어느 사이 회복에 다가선다. 기초학력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을 지도하고 계시는 분들께 그냥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 되네!’란 말 속에 비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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