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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세대'라 불리는 아이들에게 지금 우리가 해야하는 일

지구의 경고 속 생존을 위한 기성세대의 책임

  • 입력 2020.10.06 21:27
  • 수정 2020.10.07 08:28
  • 기자명 박지산(학부모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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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년이 다 끝나가도록 아이들이 마스크를 쓰고 학교에 다니고 있다. 거리두기를 한다고 책상은 떨어져 배치되어 있고,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한다. 같이 보드게임을 하거나 장난감을 같이 가지고 노는 것을 금지한 곳도 있다고 한다. 코로나로 개학이 미뤄지다가 더 이상 개학을 미룰 수 없는 지점에 학교들은 온라인 개학을 했고 아이들은 화상수업을 받았다. 지금은 다시, 오프라인 개학을 한 상태이지만 코로나의 단계가 올라가면 학교수업은 다시 온라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즈음에서 나는 다시 온라인 수업이 시작된다면 학교를 계속 다니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학교라는 곳은 선생님을 만나 직접 눈을 마주보며 삶의 배움을 얻고, 친구들을 만나 몸을 섞고 땀을 흘리면서 관계를 배우는 과정인데, 학교가 보육과 안전관리, 보호감시의 시스템만 남은 곳이 된다면?

마스크를 쓰고 수업을 듣는 학생들(사진 ⓒ전남교육청)
마스크를 쓰고 수업을 듣는 학생들(사진 ⓒ전남교육청)

 

기성세대가 만든 코로나세대

아이들은 전례 없이 난폭하고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침마다 오는 긴급재난문자에는 ‘조금이라도 힘들면 집에서 쉬기, 대화자제, 모임금지, 외출자제, 방역소독 철저히.’ 같은 글자들이 빼곡하게 쓰여 있다. 지금 이런 문자들이 이 아이들이 언젠가 기억해야 하는 어린 시절의 이미지가 될 것이다. 이 아이들이 기억해 낼 어린 시절에는 지금 어른들이 ‘나 어릴 적에’라는 말을 하면서 느끼는 정겨움과 그리움의 향수가 있기 어렵다. 우리들은 이 아이들을 ‘코로나세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코로나가 등장하기 전과 그 이후의 세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어놓고 있다. 동의한다.

아이들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 교육에만 온 힘을 다 써야 하는 선생님들도 이 상황에서 사고가 불거지지 않게 하나하나 조심하고 관리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아졌다. 온라인 수업을 따로 준비해야 하는 과정들이 생기고보니 그 이전에 준비했던 학습 매뉴얼들은 처음부터 다시 쓰이고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그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다.

코로나 때문에 학교를 가지 못한 기간 동안 집에서 보육을 전담해야 하는 부모들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가 발생하고 나서 그 이전보다 가정폭력이 늘었다는 소식을 여기저기서 들었다. 아이들은 그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서건 부담스럽게 떠맡겨진 존재들이 되었다. 아이들의 이런 사정을 생각해보니 슬픔과 미안함 때문에 불쑥 눈물이 쏟아졌다. 결과적으로 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만든 것은 이 시대를 아낌없이 소비하고 개발해왔던 우리, 기성세대들이기 때문이다.

 

ⓒsergio souza(출처 unsplash.com)
ⓒsergio souza(출처 unsplash.com)

인간이 만들어낸 불행

코로나19의 시작이 박쥐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지구에 같이 생존해왔던 박쥐가 왜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코로나 바이러스를 안겼을까.

성장과 자본에 눈이 먼 기업들과 국가는 끊임없이 숲을 파괴하고 새로운 산업시설을 만들면서 그 안에 살고 있던 동물들의 서식지를 파괴했다. 동물들은 집을 잃었고 자신의 집을 떠나 인간이 사는 지역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박쥐의 몸에 서식하고 있는 수없이 많은 바이러스는 그에게는 면역이 되었지만 불행하게도 인간과 인간이 사육하고 있는 가축들에게는 매우 취약하고 생소한 바이러스였다. 인간은 이 균의 면역체계를 갖거나 치료제를 아직 만들지 못했다. 설령 치료제를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지금은 바이러스의 진화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이제 앞으로 또 어떤 바이러스가 전 인류를 강타할 지 알 수 없다. 지구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문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2019년,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 숲이 불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호주에는 산불이 6개월간 지속되었다. 사하라 사막에는 폭설이 내려 평생 사막밖에 경험하지 못한 낙타들의 긴 눈썹 위에 눈이 내려앉았다. 시베리아의 지표면 온도는 40도 씨에 육박해서 얼음벌판이어야 하는 곳이 호수가 되었다. 투발루라는 나라는 9개의 섬나라로 이루어진 나라인데 그 중 2개의 섬이 물에 잠겼다. 불과 며칠 전에는 중국에 한 달째 장마가 이어졌고 일본역시 그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집들이 그냥 배처럼 떠내려갔다.

우리에게 닥친 현재

세계 여기저기서 기후재난 뉴스가 쏟아지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당장 다른 곳에서 일어난 재난을 관망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기후위기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기후재난은 이웃나라의 일이 아니고 곧 우리의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빙하가 녹고 있고 빙하에서 녹은 물들이 바다의 해수면을 높이고 있다. 물에 잠기고 농경지를 잃고, 땅을 잃어버리니 먹을 것이 부족하고, 집도 사라져서 살던 곳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은 기후난민이 되었다. 기후난민이 생기면 폭동과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이제 기후난민은 전체 난민의 61%가 넘어서 전쟁난민보다 많아졌다. 그러나 정작 이 일들에 책임이 있는 선진국에선 자국에 기후난민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다를 떠돌다 어디도 내리지 못하고 죽은 난민들이 생겼다.

이게 우리 가족의 이야기이고 내 아이의 이야기라고 생각해봐야 한다. 코로나19가 그게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탄소예산이라는 것이 있다. 지구의 재앙이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이르기 전까지 우리가 쓸 수 있는 탄소배출량을 과학자들이 계산한 것인데,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방식과, 사회의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짧게는 8년에서 이제 길어봐야 15년 남짓해서 우리가 쓸 수 있는 탄소예산이 바닥나고 만다고 한다. 이 탄소예산이 바닥나고 나면 더 이상 인류는 지구의 재앙을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기후과학자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Photo by Andreas Gücklhorn on Unsplash
ⓒAndreas Gücklhorn (출처 Unsplash)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

약 8~15년 후 지구라는 별이 대멸종을 하거나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지금 아이들이 마스크를 쓰고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하루 종일 학과공부를 하며 시험을 잘 보고,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아이들의 미래로부터 강탈해온 지구의 에너지를 어떻게 회복시키고, 어떻게 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마음을 구원해낼 수 있는 방법을 잊지 않게 도와줄 수 있는지를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코로나보다 더 센 전염병이 온다면 우리는 각자의 방에 격리 될 것이다. 사람이 만나고 싶어도 사람이 보균자여서 만날 수 없도록 금지된 세계가 우리 앞에 들이닥친다면.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훼손된 세계에서 과연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나무를 심고, 마을을 만들고, 지방으로 가서 흙을 되살리며 땅의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을 만들고 산과 숲을 보호하고 복원해야 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작은 일들이 어쩌면 이 어마어마하게 큰일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올해는 아이들하고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학교 텃밭에서 같이 농사를 짓고, 흙과 풀을 만지면서 풀들의 이름을 맞춰보거나 알아보는 것, 숲과 강과 논에는 어떤 생물이 살고 있는지 찾아보는 것, 숲을 걸으면서 숲이 주는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 텃밭에서 자란 옥수수를 같이 삶아 먹으면서 친구들과 시시한 농담을 하는 것, 사람이 사람을 만나 우정을 나누는 것이 어떤 빛나는 마음을 만들어주는 지 느낄 수 있게 되는 것, 사람이 자연 속에 있을 때,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동등한 존재로 어울려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는, ‘숲이면서 광장이고 광장이면서 동시에 개인의 가장 아늑한 방’ 같은 곳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Photo by Robert Collins on Unsplash
ⓒRobert Collins (출처 Unsplash)

 

마을의 기억을 대물림해주자

그것이 마을이 아닐까. 그 마을이 학교가 아닐까. 마을과 학교가 따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이면서 동시에 학교인 곳,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들을 친구들과 놀면서 알아내고 마을의 어른들로부터 받은 가르침과 호혜적 관계를 언젠가 마을의 동생들에게 다시 대물림해 줄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있다면 아이들이 언젠가 어른이 되어서 혹여 라도 참담한 마음을 지나고 있을 때가 온다 하더라도 스스로를 치유할 힘을 갖게 된다고 믿는다. 마을이 먼저 학교가 되어도 좋고, 학교가 먼저 마을이 되어도 좋다.

구원이란 결국 이런 것들이 아닌가. 개개인의 빛나는 어린 시절과 마을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상처를 회복하고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이 사뭇 다를 것이다.

울 수 있는 곳, 기대도 좋은 어른이 있고 같이 있기만 해도 그것 자체가 위로가 되는 친구들이 있을 때, 아이들은 살아난다. 이렇게 살아난 아이들이 영웅이다. 그들이 다른 이들을 살피고 살리고 살아내게 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자신을 방에 가두고 죽지 않을 것이다. 많은 동화에서 아이들이 세계를 구원했던 것은, 더 이상 우화가 아니다.

우리가 지금 고작 할 수 있는 일들은 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중지하지 않고 끝까지 듣는 것. 이제까지 우리가 망쳐왔던 세계에 대해 사죄하고 고백하는 것, 그리고 그 아이들이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거침없이 뛰어가고 있을 때 그들이 절벽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 그리고 그 옆에 언제까지고 같이 서 있는 것이다.

그 모든 일들이 가망 없이 보이는 순간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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