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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냄새 안나요?

어느 날, 라면 냄새와 함께 생명과학이 내게로 다가왔다.

  • 입력 2020.08.19 15:39
  • 수정 2020.08.19 17:31
  • 기자명 홍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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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킁킁. 이 매콤한 라면 냄새는 무엇인가? 현재 시각은 오전 아홉시. 아침 식사를 자주 거르고 출근하는 나에게 이 냄새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어떤 녀석이 학교에서 라면을 먹고 있는가, 압수하여 내 위장을 채워주리. 하지만 기대와 달리, 라면 냄새의 근원지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이었다. 벽에는 주기율표가 붙어 있고 교탁 앞에는 DNA 이중나선모형이 서 있으며 책상 뒤에는 천체 망원경이 자리잡은 딱딱한 공간- 과학실이다. 활짝 열린 과학실 문 밖에서 까치발을 하고 쳐다보니, 우리 학교 생물 선생님이 어서 들어오시라며 손짓을 한다. 저야 감사하죠. 과학실 책상에 둘러앉은 아이들은 저마다 냄비 속에 무언가를 열심히 집어넣고 있고, 문어, 치즈, 소세지, 양파, 심지어 옥수수 콘까지 갖가지 종류의 재료들이 주인인 양 라면 위에 둘러져 있다. 뭐지? 가정 시간으로 바뀐건가?

 

라면과 다양한 재료로 표현하는 세포 만들기!

  말인즉슨, 식물 세포와 동물 세포의 내부를 라면과 여타 음식 재료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라면을 끓여 냄비 속이 하나의 세포 바탕이 되고, 그 안에 다양한 재료들이 들어앉아 세포 내부를 구성하는 방식이다. 혈액형 찾아내기보다 더 재밌는 생명과학 수업이 있었다니, 맙소사.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이건 무엇이냐, 이건 왜 이렇게 자르냐 캐물어보니 대답들도 척척 해낸다. "이건 리보솜이구요, 저희는 깨로 표현했어요. 이걸 뿌려야 거친면 소포체가 돼요.", "골지체는 원래 살짝 떨어져 있어서 파프리카를 엉성하게 끼운거예요." 내가 아는 세포 내부는 오직 미토콘드리아 뿐이었는데, 이 아이들은 라면 냄새를 맡으며 세포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수업을 주관하는 선생님께 살짝 여쭈어보니, 생각보다 다들 훨씬 잘해주고 있다며 아이들의 창의력은 따라갈 수가 없단다. 생명과학을 가르치는 전국의 많은 선생님들이 이 라면세포 만들기 수업을 진행하신다는데, 다른 학교의 작품들을 얼핏 보아도 모든 아이들의 라면 세포가 서로 판이하게 다르다. 흥미로운 수업의 장을 열어주시는 선생님들의 기대에 맞추어 아이들도 그만큼 학습 의욕이 높아진다는 뜻일게다.

 

수업은 홀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수업을 잘하는 교사'란 어떤 교사일까? 물고기를 낚아 입 속에 넣어주던 -대신 개개인의 뱃속 차이는 고려하지 않아 누구는 배고파하고 누구는 탈이 나던- 예전의 주입식 및 강의식 수업은 이제 과거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그 수업 방식이 옳지 않거나 유효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필자도 여전히 강의식 수업을 선호하고, 특히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단시간에 다수를 대상으로 효율적인 지식 전달을 하기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방식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수의 엘리트를 양산하는 것이 아닌, 모두에게 교육의 효과가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배고픈 자와 탈이 난 자가 존재하는 수업 방식을 조금은 비틀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학교 과학 선생님이 진행한 라면세포 만들기 수업이 그 좋은 예시이다. 선생님은 수업 과정을 모두 찍어 영상으로 남겼는데, 이 영상 속 아이들은 시종일관 즐거운 표정으로 모두가 수업에 집중하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본인들이 스스로 이끌어가야만 완성이 되는 수업이니, 또한 라면 냄새도 솔솔 풍기니 이보다 좋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교사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 아이들에게 라면 세포에 대한 기본 지식을 전달하고 스스로 예시를 만들어 생각의 불을 지펴주는 것은 교사다. 교사와 학생이 하나 되어 수업이라는 작품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수업을 영상으로 남겨 모두에게 공유한 것 역시 새로운 도전이다. 교사가 자신의 수업을 완전히 열린 공간에서 공개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온다. 내가 아는 어떤 선생님은 수업 공개가 다가올 때마다 급체를 한다고도 들었다. 나 역시 수업 공개는 꽤나 부담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수업이 교사 혼자만의 원맨쇼로 진행되기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내가 수업을 하다가 버벅거리면 어떡하지, 아이들이 잠을 자거나 집중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다양한 돌발 상황에 내 능력이 부족하다고 보일까 염려하고 또 염려한다. 그러나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만들어나가고, 수업의 주체가 학생이 될 때 비로소 이 고민은 사라진다. 수업이란 교사 혼자만이 기획하고 펼쳐 나가는 것이 아니므로 어떠한 상황도 생길 수 있음을 이해하고, 그 상황도 다같이 수업의 일부로 끌어들이게 된다. 더불어, 내 수업을 공개함으로써 수업에 참여한 아이들에겐 복습의 기회를, 단순 구독자들에게는 새로운 수업을 엿볼 기회를 제공한다. 교사 자신에게는 더없이 좋은 자기장학의 장이 되기도 한다. 다가오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그리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더 이상 교사가 교실에만 머무르지 않고 온라인 공간을 활용해야 한다면 이러한 경험이 가장 큰 자양분이 될 수도 있다.

라면 세포 수업을 진행하신 선생님은 이제 아이들이 직접 만든 영상으로 주기율표를 소개하도록 하고, 각각의 원소 기호에 QR코드를 부여하여 서로 영상을 찾도록 하는 수업을 구상하고 계신다. 그의 새로운 수업이 무척이나 기대된다. 그리고 이번 수업에서도 역시 학생들이 얼마나 즐겁게 참여할지 미소가 지어진다.

 

약산고등학교 생명과학 수업 영상: https://youtu.be/vGeEl_ePdfg

이제 갓 교육자의 길로 들어선 신규 선생님의 열정이 가득 담겨있다. 수업 계획부터 진행, 마무리와 영상 제작 및 편집까지 선생님의 노력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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