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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서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다

역사문화체험하자 전문적학습공동체 나주 체험

  • 입력 2020.07.03 09:34
  • 수정 2020.07.03 10:19
  • 기자명 김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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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과거와 현재의 삶을 통해 미래 삶을 가르치고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교육은 살아있는 삶의 경험을 배제하고 일반화된 개념을 주로 가르쳐왔다. 눈물나고 쓰고 달고 맵고 사랑스럽고 아픈 개개인의 감정은 사라지고, 맛도 없는 지식의 개념을 머리로만 새겨왔다. 아무리 역사와 문화를 배워도 구체적인 현장에 가면 그곳만의 문화와 역사의 맛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역사문화 지식인 현실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낼 수 없었다.

역사문화체험하자 전문적학습공동체는 새로운 교육을 시도하려는 교사들 모임이다. 교육을 지식 이론으로만 아는 한계를 극복하고, 직접 몸의 오감으로 지역의 역사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모였다. 전라남도 각 지역을 발로 걸으며 땅의 감촉을 느끼고, 바람의 숨결을 코로 맡으며 현재 지금 이곳, 발 딛는 곳에서 시작하여 과거에서 미래로, 여기에서 다른 지역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나주를 시작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목포, 고흥, 광양, 여수, 순천 등 전라남도 곳곳을 답사할 예정이다. 답사를 하면서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잘못된 지식을 고쳐나가고 세상과 나를 새롭게 발견해 나가려고 한다.

나주 답사의 주제는 나주 의병과 항일 독립 운동 흔적을 찾아서이다. 일요일이고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도 불구하고 17명의 선생님들이 금성산 자락의 난파정에 모였다. 각자 사는 곳도, 근무하는 곳도 다르지만, 우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 알고 학생들에게 전해주고 싶다는 뜨거운 마음으로 이렇게 모인 것이다.

나주시는 2천년 역사를 지닌 오래된 도시이다. 새롭게 개발된 도시에 밀려 자꾸만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혀지고 있다. 나주시는 원도시와 신도시로 구분되어 투자가 신도시인 빛가람동에 몰려 있다. 그래서 원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해서 신도시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일반화되어 있어 마음이 위축되어 있다.

그러나 나주 원도시에는 높은 건물로 치솟는 신도시에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여온 역사와 문화를 풍부하게 품고 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자랑스럽게 나라를 구하려는 항일저항과 독립정신이 면면이 이어져 온 왔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이다.

오늘 답사는 조상들의 나라를 구하려던 뜨거운 정신을 현재 아직까지 남아 있는 문화재 속에서 발견해 가는 길이 될 것이다. 현재에서 과거로 깊이 들어가는 길이다. 답사 여정은 남파정에서 시작하여 목서원, 나주읍성 서성문, 나주향교, 금성관아, 나빌레라 문화관, 남파고택, 남산의 김태원과 조정인 의병장 기념비, 나주역과 학생독립운동기념관 순이다.

남파정은 한말 의병의 시작점으로 볼 수 있다. 금성산 기운을 머금고 있는 남파정은, 한말 나주의병을 일으킨 정석진의 집이다. 그는 나주 호장으로서 동학군을 크게 물리쳐 해남군수가 되었다. 그러다 1895년 일본군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보고 공분하여 격문을 통해 나주 나주 향교의 유생들에게 의병으로 나설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나주 의병 활동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하였다.

정석진의 훌륭한 삶을 보면서 한편으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일어난다. 정석진은 처음에는 동학군을 물리쳤다. 그런데 동학군이 어떤 사람들인가? 이 나라 백성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일본은 물러가고 탐관오리의 높은 세금은 줄여주고 신분과 종교의 자유 속에서 평등하게 살자고 외친 사람들이다. 왕의 명령 하에 관군과 양반 유림은 일본군과 손잡고 이 나라 백성인 동학군을 전멸시켜 버렸다. 고려 왕건의 영향으로 지은 나주읍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는데 그 중 서성문은 금성산에서 내려온 동학군을 관군에게 전멸시킨 곳이다. 동학군이 사라지면서 일본은 야욕을 드러내고 왕권을 유린하고 이 나라 국토를 짓밟고 빼앗아 버렸다.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도록 막은 지배계층의 집단 이기심은 우리나라를 36년간 잃게 했으며, 현재까지 분단으로 그 대가를 받고 있다. 잘못된 판단 결과가 이렇게 크고 엄중하다.

답사한 여러 장소 중에서 ‘남파고택’이 인상 깊다. 나주학생운동을 촉발한 청년 박준채와 사촌 박기옥의 집이기도 하다. 100년이 넘은 집인데도 튼튼하고 마루는 반들반들 윤이 나도록 잘 닦여 있다. 안주인의 부지런함과 정성이 엿보인다. 주인장인 박경중 어르신의 집안 가풍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박준채 청년의 행동이 단순히 우발적인 행동이 아님을 확인하였다. 이 집은 한 마디로 뼈대있는 집안으로서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면서 교양있게 살아온 집안이었다. 그런데다 이들은 독서운동 회원으로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청년들이었다. 일본인들의 부당한 대우를 참아오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학생이 사촌 누이를 희롱한 것을 보고 의기를 분출한 것이다. 일본형사의 편파적 대우에 나주학생운동이 결국 광주학생운동까지 확대된 것이다.

박준채를 비롯하여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 관련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체포되어 고문당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이들은 얼마나 용기있게 행동했는가? 나라면 과연 희롱하는 일본인 학생에게 대들 수 있을까? 희생을 무릅쓰고 강자에게 대들며 약자를 도울 수 있을까? 부끄럽지만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지금은 남의 나라 지배를 받는 것도 아니고, 감시의 눈초리가 번뜩이는 독재사회도 아닌데도, 함부로 나서거나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조금이라도 손해가 날 것 같으면 숨죽이고 가만히 있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다시 생각해 본다. 어쩌면 그때 유림이나 양반들 또한 단순히 이기심 때문이 아니라, 당시 주변 상황이 앞으로 나서기에는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일본군을 도와 동학군을 없애라는 왕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군이 왕을 감금하고 왕비를 시해한 것을 보고 나서 목숨 바쳐 저항 운동을 하였다. 그때 당시의 상황을 겪어보지 않고 쉽게 판단한 것은 나의 교만함이다.

나주 답사를 마치고 나니, 나주가 새롭게 보인다. 오랜 세월동안 이 나라를 지켜온 조상의 정신적인 힘이 아직도 굳건하게 뿌리 내리고 있음이 보인다. 잦은 국난 속에서도 이 나라가 잘 버텨온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조상들의 희생으로 얻은 조국에서 살고 있다. 그들의 희생을 가치있게 하는 것은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자주와 독립, 자유와 평등의 정신을 키워가며 서로 도우며 사는 것이리라. 우리는 역사적 과제을 안고 있다. 그분들이 원하는 조국의 모습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남북이 더 이상 싸우지 않고 같은 민족으로서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 이러한 정신을 우리 학생과 함께 나누는 것이 나의 역할일 것이다. 말이나 개념이 아닌, 그들의 죽음 위에 새워진 비석을 쓰다듬으며 그들의 꿈과 희생을 학생들과 함께 염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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